기독교인이 역사를 알아야 하는 이유가 뭘까. 한규무(61)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신임 소장은 10일 지난 서울 마포구에 있는 연구소에서 “교회 역사를 굳이 몰라도 신앙생활 하는 데 조금도 지장이 없다”고 말했다. 의외의 답이었다.
기독교 민족 운동사를 전공한 한 소장은 1997년부터 광주대 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지난달 소장에 선임된 그의 임기는 2년이다.
한 소장은 부연했다. 그는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이 있지만 사실 역사를 몰라도 미래는 있고, 사는 데 조금의 지장도 없다”면서 “다만 한국교회가 걸었던 역사를 아는 건 신앙의 후손으로 지켜야 할 도리 중 하나”라고 강조했다. 그는 “역사 속에서 잘한 일과 부끄러운 부분을 알고 교훈을 얻어야 다시는 비슷한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다”며 “‘건강한 미래’를 여는 지름길이 역사를 배우는 것”이라고 조언했다.
한 교수는 성도라면 반드시 알아야 할 우리 교회사의 중요한 장면들을 짚었다. 가장 먼저 꼽은 사건은 1882년 한미수호통상조약이었다. 이 조약은 주권 독립국가 사이에 맺은 평등 조약으로 미국과의 인적·물적 교류의 물꼬를 여는 계기가 됐다. 한 교수는 “1884년 앨런과 이듬해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선교사가 입국하는 등 수많은 선교사가 내한하는 데도 이 조약이 기여한 바가 컸다”고 평했다.
그다음은 1919년 3·1운동이었다. 한 교수는 “3·1운동의 주축이 기독교인이었다 해도 지나치지 않다”면서 “민족을 깨웠고 상해에 임시정부를 수립한 동인을 제공한 3·1운동은 지금을 사는 기독교인이 잊어서는 안 될 역사적 순간”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1937년 중일전쟁이 시작된 이후 신사에 참배한 건 부끄러운 역사라고 했다. 그는 “기독교 지도자와 성도가 신사를 찾아 참배했던 건 치욕스러운 역사”라면서 “1941년 태평양전쟁 이후 선교사마저 추방당한 뒤에는 교회가 큰 핍박을 받았다”고 밝혔다.
양적 성장의 변곡점은 6·25전쟁이었다. 한 소장은 “전쟁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여러 해외기관과 교회가 우리 교회를 통해 다양한 후원을 했다”면서 “교회가 복구 지원의 전면에 서면서 교인도 늘기 시작했다”고 진단했다. 이어 “물론 이는 교회 성장의 외부적 요인이고 내부적으로는 목회자들의 영적 능력이 교회 성장을 견인했다”고 설명했다.
한 소장은 4년 전부터 집필을 시작한 ‘내한선교사사전’의 출판을 임기 중 마무리 지을 예정이다. 한 소장은 “1994년 나온 내한선교사총람 이후의 연구 결과를 담아 내한선교사사전을 만들고 있다”면서 “이 사전에는 내한하지는 않았어도 우리 선교에 영향을 준 선교사들의 명단까지 담아 활용도가 높다”고 밝혔다. 사전은 연구소 창립 40주년인 오는 9월 27일 나올 예정이다.
한 소장은 “교회의 관심과 후원이 기독교 역사 연구자 발굴과 육성은 물론 다양한 연구를 가능하게 한다”면서 “교회의 건강한 미래를 여는 데 교회들이 참여해 달라”고 요청했다.
글·사진=장창일 기자 jangc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