록웰(1851~1910) 선교사. 한국 이름은 우락웰이고, 영어 풀네임은 네이선 로운스버리 록웰이다. 미국 코네티컷주 리지필드 출신으로 사업가였다. 예일대 입학시험에 합격했으나 진학을 포기하고 가업인 제화업에 투신해 30년 만에 리지필드에서 제일 큰 구두공장을 경영했다.
50대 중반 실업인으로 부인 및 2남1녀 자녀와 함께 안정된 생활을 하던 록웰은 1905년 안식년을 맞아 귀국한 미국 감리회 한국선교회 평양지방 감리사인 노블을 만난다. 한국에서 부흥운동이 일어나 교회와 교인들이 새롭게 변화하고 있다는 선교 보고를 읽는다. 한국 방문을 꿈꾸던 중 1907년 11월 부인과 자녀들을 동반하고 실제 평양 대부흥 현장을 찾아간다. 평양 기홀병원 사택에 머물며 한국 교인들이 어떻게 성탄절을 지내는지 궁금해하던 그는 시각장애인 여학생들이 공부하고 예배드리는 모습을 보고 감동을 받는다.
록웰은 1908년 1월 평양을 떠나 귀국하는 부인과 자녀들을 미국 캘리포니아까지만 동행한 후 자신은 발길을 돌려 다시 한국으로 향한다. 가족과 떨어져 홀로 이곳으로 되돌아올 당시 태평양을 건넌 배편은 이등칸이었다. 일등칸 대신 절약한 돈을 중국 취푸에 가서 농아교육을 받으려던 평양 교인 이익민 부부의 여비로 내놓는다. 요즘으로 치면 한국기독실업인회(CMBC) 소속 인사가 선교사가 돼 제3국 농아교육의 창시자로 거듭난 것이다.
혹독한 환경에서 사역하던 록웰은 1910년 기관지염에 폐렴이 겹쳐 평양에서 별세했다. 그의 뒤를 이어 부인 록웰이 평양의 맹학교 농학교를 후원했고, 딸 앨리스는 존스홉킨스 의과대학을 졸업한 후 록펠러재단 파송으로 중국 베이징에서 의료선교사로 사역하며 평양의 장애아동 교육을 지원했다.
우리가 잘 몰랐던 록웰 이야기는 최근 발간한 ‘내한선교사사전’(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에 수록돼 있다. 사전은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내한한 1885년부터 선교 100주년을 맞은 1985년까지 한국을 거쳐 간 내한선교사 3179명 가운데 행적이 파악된 2749명을 수록했다. 일본의 가가와 도요히코 목사부터 미국 YMCA 선교사 헨리 힐튼까지 가나다순이다.
사전 집필위원장을 맡은 이덕주 감리교신학대 은퇴 교수는 세 가지 차원의 ‘SVM’을 말했다. 먼저 학생자원운동(Student Volunteer Movement)이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둘 다 제물포 땅을 밟을 때 20대 청년이었다. 19세기 말 서구 교회에 열풍처럼 번진 학생자원운동의 열매로 수많은 청년 대학생이 선교사로 자원해 한국 땅에 와서 복음을 전하고 때론 목숨을 희생하기도 했다. 내한선교사사전은 140년 전 서구 학생들의 열정과 헌신에 빚을 갚는다는 마음으로 2014년부터 시작된 프로젝트다.
두 번째는 학자자원운동(Scholar Volunteer Movement)이다. 한국 교회사를 전공한 학자 90여명이 자원해 집필에 참여했다. 원고료 없이 작업했지만 엄격한 학술 기준에 따라 출처를 밝혔고, 논쟁 중인 사안은 객관적으로 기술했다. 학계에서 드문 학자들의 집단적 자발적 저술이다. 마지막으로 후원자원운동(Sponsor Volunteer Movement)이다. 200자 원고지 1만8000장의 방대한 원고를 4x6배판 하드커버로 펴내려면 원고료 지출 없이도 억대의 제작 비용이 필요했다. 이 교수는 “연구소 초대 소장인 이만열 전 국사편찬위원장이 수천만원을 기부하는 등 한국교회와 뜻있는 분들의 후원으로 출판이 가능했다”고 말했다.
챗GPT가 몇 초 만에 설교문까지 뚝딱 만들어내는 시대, 한국의 교회사 학자들은 8년에 걸친 기획과 1년여의 공동 집필을 거쳐 1520쪽짜리 내한선교사사전을 발간했다. 복음의 빛을 전한 선교사들의 사랑에 학자들은 영혼이 담긴 저술로 응답했다.
우성규 미션탐사부 차장 mainport@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