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창립, 본격적 한국교회사 연구
‘한국사’전공에서 ‘한국기독교사’연구자로 나선 교회사가
1980년 신군부에 의해 4년?간 교수직에서 해직
이만열(李萬烈)은 경상남도 함안군 출신으로 어린 시절은 고향에서 초등학교를 마치고, 삼촌 두 분이 마산에서 살고 있어서 중학교와 고등학교는 마산에서 다녔다. 총명했던 만열은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단재 신채호의 역사학에 관한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아, 숙명여자대학교 사학과에서 가르치기 시작해 명예교수로 정년 퇴직하였다.
숙명여자대학교 재직시 당시 전두환 신군부에 의해 1980년 7월부터 1984년 8월까지 4년간 해직 상태로 지냈다. 휴직 기간에 젊었을 때에 하고자 했던 꿈이 이루어졌다. 박윤선 박사가 막 시작한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에서 학교의 요청으로 한국교회사를 가르치면서 동시에 학생으로 등록해 신학을 공부한 것이다. 후에 기독교사상지에 글을 쓰기도 하고, 대한성서공회 100주년을 앞두고 성서공회 100년사 집필 의뢰를 받고 자료정리와 자료수집을 위해 미국성서공회와 대영성서공회를 방문하여 프린스턴신학교와 미국 장로교 역사자료실, 카나다 장로교 선교부와 미국 감리교 본부를 방문하여 선교사들이 기록한 한국 관계 문헌들을 열람하고, 많은 자료들을 마이크로 필림으로 복사해 국내로 가져왔다. 1982년 그 자료들을 국내 한국교회사 관련 연구자들과 함께 '한국기독교역사연구회'를 조직했다. 이를 초교파적으로 운영해 오다가 '사단법인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로 개편, 오늘의 한국교회사 연구의 발판을 놓았다.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의 창립은 이만열 박사에겐 인생 후반의 전기가 되기도 하였다. 수집된 자료로 UCLA대학 교수로 있는 옥성득 박사와 함께 <대한성서공회 100년사>를 집필했다.
그는 숙명여대 교수로 복직한 이후 도산학회, 함석헌학회, 김교신선생 기념사업회 회장, 복음과상황 공동발행인, 외국인근로자를 위한?희년선교회 대표,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소장 및 이사장을 역임했고, 대한민국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다. 그리고 현재는 사)뉴코리아 대표, 사)남북역사교류협회 이사장, 학교법인 상지학원?이사장 등을 맡고 있다.?
주일학교에서 배운 '성수주일'이 신앙생활에 큰 영향
그는 고백한다. "내가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지속하고 있는 것은 어릴 때 받은 주일학교 교육의 영향이 크다. 고향 함안지역은 1897년에 호주 선교사가 세운 교회가 있고, 1909년에 세워진 군북교회가 있다. 이 교회를 세울 때 우리 할머니, 아버지, 삼촌들이?힘을 많이 썼다. 해방이 되면서부터 그 교회를 열심히 다녔다. 해방이 되던 해가 초등학교 1학년?때인데, 아침에 일본인 교장 훈시를 듣고 학교 내 신사 앞에서 묵념하는 의례가 없어진 것만 달랐지, 해방의 의미는 몰랐다. 그러나 주일학교에서 모세와 출애굽, 삼손, 다윗, 다니엘 이야기를 들으며, 어떻게 식민지 치하에서 투쟁을 통해 해방을 얻게 되었는가를 배웠다"고 하였다.
자신이 역사공부를 하게 된 것도 주일학교 교육의 영향이었다고 고백하면서, 오늘날 피폐해 가고 있는 주일학교 교육 실태를 바라보면서 한국교회의 미래를 걱정하기도 하였다.
그는 오늘날 한국교회 주일학교가 사라질 수 밖에 없는 필연적인 요인을 지적한다. "저희 때만 해도 주일성수를 매우 강조했습니다. 어릴 때 주일성수 교육을 받고 집에 와서 머슴들이 일하는 것을 보고, 어머니 저 사람들 오늘 일해서는 안되지 않습니까?"라고 할 정도로 성수주일 교육을 철저히 받았는데, 요즈음 한국교회는 성수주일 교육을 등한히 하고 있음을 질타하며 안타까워 하고 있다.
자신은 대학 4년동안 8번의 학술답사 행사가 있었는데, 그 일정 중에는 꼭 일요일이 끼여 있어서 한 번도 그 답사 행사에 참가하지 못했다고 했다. 이유는 주일학교에서 주일성수에 대한 신앙훈련을 철저히 받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1972년 숙명여대 재직시에 10월 유신이 있었는데, 대학교수로서 사회의식이 많이 생긴 때이라 이 때는 못견디겠습디다. 한국의 민주주의를 완전히 후퇴시키는 유신인데 역사를 공부한다는 젊은 교수가 한 마디 못했으니까. 그래서 1973년에 쓴 글이 <한말 기독교인의 민족의식 형성과정>이란 논문이었는데, 그 논문을 읽은 사람들이 그건 한말 1910년대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우리 이야기라고 생각했던지 그 논문을 읽은 진보적 교회 인사들이 저를 부르기 시작했고, 기장측에 속한 김상근 목사, YMCA 강문규 회장 등이었고, 이게 원인이 되었는지? 모르지만 1980년대에 같이 교수직에서 해직된 이문영, 안병무, 서광선, 현영학, 서남동 교수 등과 동지가 되어 함께 투쟁하였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죽고, 서울의 봄이 올 줄 알았는데, 전두환 장군이 이끄는 신군부가 12.12 사태를 일으키게 됨으로 민주화는 커녕 분위기가 확 바뀌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결국 5.18 사태에 이르게 되었다. 신군부는 1980년 5월 17일 저녁에 요시찰 인사들과 각 대학 학생회장들과 간부들을 모두 잡아들였다. 당시 해직된 교수들이 86명이었다. 그 중 30여 명은 해당 학교의 분규로 해직되었고, 50여명은 시국 관련으로 해직된 자들이었다."
해직 기간 신학훈련 마치고 한국기독교사 자료 수집 및 정리
그는 또 해직된 동안 감사한 일이 많았다고 한다. "저는 기독교인이고 전에도 가끔 교회에서 설교도 하고 강연도 했기 때문에 교회에서 저를 자주 청해주었습니다. 청하는 이유 가운데 물론 강연을 듣겠다는 이유도 있었겠지만, 해직된 후엔 경제력이 없어지니까 강사료를 주어서 생활에 보탬이 되게 함이었던 것입니다. 그 중 하나는 5.18 만주화 운동 1주년 되는 때에 광주YMCA가 초청하여 3일 간이나 강연을 하게 되었고, 또 하나는 서울 향린교회에서 한 강연인데, 그 때 문익환 목사, 이기탁 교수, 송건호 선생 등과 함께 두 사람씩 짝이 되어 강연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청중 속에는 건장한 남자들이 여기저기 섞여 있었는데 알고 보니 당국에서 파견한 형사들이었습니다."
이만열 박사는 젊었을 때 소원이 목사(牧師)가 되는 것이었다고 한다. 대학을 졸업하고 신학교에 진학하려고 하니, 소속 교단 고려신학교가 부산에 위치하고 있어 당시 이 박사는 어머니와 동생 셋을 부양했던 관계로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 소원은 뒤늦은 때였지만 해직교수가 된 후, 박윤선 박사의 권유로 합동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강도사 고시에까지 합격했으나 담임목사의 꿈은 접기로 하였다고 고백한다.(기독교사상 2021년 10월호, 최상도 교수와의 대담).
이만열 박사가 한국근현대사 연구에서 <한국기독교사>로 학문 영역이 확대된 계기가 있었다. 1980년 7월 신군부에 의해 교수직을 해직 당했을 때, 해직 기간동안 미국에서 내한 선교사 관련 자료를 수집하면서 자신의 학문 영역이 기독교사로 자연스럽게 확대되었다는 것이다. 자신의 전공이 한국사 중심이었는데, 이 때의 자료 수집과 '기독교역사연구회' 설립을 계기로 한국교회사 연구에 더 집중하게 되었고, 논문도 그 쪽으로 더 많이 쓰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말하기를, "내가 스스로 평가해 볼 때, 저는 일반 한국사를 공부한 사람으로서 한국교회사를 연구한 최초의 학자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 전까지는 한국교회사 연구를 대부분 신학 하신 분들이 했습니다. 백낙준 민경배 송길섭 교수도 신학을 하고 교회사를 연구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한국사를 공부하고 교회사 연구로 넘어온 셈입니다. 저 다음부터 윤경로 교수나?김흥수 교수를 비롯해서 일반사학이나?종교학을 전공한 이들 중에 한국교회사를 주제로 학위를 하는 사람들이 많이 나오게 됐습니다. 사실 백낙준 박사나 민경배 박사의 경우는 자료를 가지고 실증적으로 한국교회사를 연구했지만, 다른 분들은 주로 구전으로 들은 것을 그냥 강의 시간에 얘기해 주는 정도였어요. 엄격한 학문적 검증을?거치지 않은 것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한국사 연구의 기초를 가지고 한국교회사를 하게 된 사람들은 역사학 방법을 교회사에 도입했습니다.
또 하나는 자료를 공유하면서 공동연구의 계기를 마련한 것입니다. 백낙준 박사나 민경배 박사는 주로 혼자서 자료를 찾고 연구했어요. 그리고 찾은 자료를 공유하지 않고 혼자 소장 하면서 개인 연구로 업적을 내고 그랬어요. 제가 후배 동지들과 함께 1982년에 '한국기독교사연구회'를 만들고, 1990년에 연구소를 함께 설립했는데 그 과정에서 자료 공유를 시작했습니다. 말하자면 집체적 연구라 할 수 있지요. 그렇게 자료를 공유하니까 여러 사람이 업적을 많이 내게 됐죠. 한국교회사 연구를 엄격한 자료 검증을 통해서 하게 된 것, 그리고 자료 공유와 공동연구에 제가 조금은 기여했다고 생각합니다."
역사 발전은 스스로 자기 문제를 주체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존재의 증가
이만열 박사는 또 "저는 글을 쓸 때 생각의 촛점을 신앙(信仰)과 민족(民族)과 역사(歷史)에 둡니다. 이런 얘기를 하면 그게 나의 역사관인 것처럼 들릴 수 있겠는데, 그런 의미는 아니고, 제 생활과 사고의 주 영역이 신앙, 민족, 역사라는 말입니다. 민족주의 역사주의가 아니라 제 삶의 바탕이 신앙과 민족 그리고 역사의 영역 안에서 움직인다는 뜻입니다.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가끔 사관(史觀)에 대한 질문을 받는데 답하기 참 어려워요. 우선 저는 역사는 시간 속에서 어떤 생동감을 파악하는 학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중심은 시간입니다. 저는 시간의 변화 속에서 인간, 지역 등의 변화를 파악해 내는 것이 역사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점에서 역사는 항상 변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 변화를 어떻게 파악 하는냐가 역사가의 중요한 역할이지요.
동양 사상에 역학(易學)이 있습니다. 여기서 역은 변할 역(易)자에요. 천태만상 변하는 것을 동양 학문으로 엮어 놓은 것이 역학이에요. 이 역학을 제대로 이해하면 역사 의식이 굉장히 높아질 거라고 생각합니다. 역학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변화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변화는 정.반.합의 변증법적 발전을 따르죠. 젊은 사람들은 저항을 해야만 사회의 변화가 오고그 변화를 통해 새로움이 올 수 있다고 보는 것이죠. 저항이 역사 발전의 동력이 됩니다. 역사를 공부한 사람도 이런 변화를 확신하기 때문에 저항하고 그 변화를 역사 발전의 동력으로 삼는 인격과 사관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자기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인간이 양적으로 증가하는 현상을 역사 발전으로 봅니다. 옛날에는 자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존재는 왕이나 권력자 몇 사람 밖에 없었는데, 민주화 이후 스스로 자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존재가 많아졌습니다. 이렇게 자유로워진 인간이 양적으로 증가할 수록 평등 문제가 대두되는데, 그러므로 역사 발전은 자기 문제를 주체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인간이 많아짐과 동시에 주체적인 인간들이 평등한 관계를 유지해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만열은 우리가 일제 하에서 차별 받은 것을 경험으로 하여 우리나라 군인들이 월남에서 주민들에게 횡포한 부끄러움도 민주화 된 국가의 일원으로써, 일본인들로부터 차별 받고 고통 받았던 바를 거울 삼아 이 땅에 먹고 살기 위해 찾아온 다민족들, 그들 거류민들에게 선의로 대하고, 오히려 봉사와 섬김으로 이를 극복해야 할 것이라고 역설한다. 일제 때 정신대 문제를 두고 일본에게 사과 배상하라고 요구하는 것 못지 않게 우리가 외국에서 잘못한 것, 특히 월남전에서 잘못한 것을 회개하고 보상하는 차원에서 이 땅에 온 이주민들에게 잘 대할 것을 강조하는 역사학자이다.
저서로는 <삼국시대사 강좌> <한국근대역사학의 이해> <단재 신채호의 역사학 연구> <역사의 중심은 나다> <한국기독교의 역사의식> <한국기독교와 민족의식> <한국기독교 수용사 연구> <대한성서공회사 1,2> <한국기독교 의료사> <역사의 길 현실의 길>(2021) 등이 있다.
[박정규 박사의 한국교회사가 열전] 이만열 박사(1938-) – 교회연합신문 (ecumenicalpress.co.kr)